정읍집강소( 井邑執綱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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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고발] 예초기 날에 잘려 나간 백양더부살이… 우리 안의 ‘생태적 맹목’을 고발한다

세계에서 오직 한국,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의 땅만 허락받아 자생하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 ‘백양더부살이’.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해 쑥 뿌리에 조용히 신세를 지며 살아가던 이 경이로운 생명이 최근 황당하고도 참혹한 결말을 맞이했다. 거대한 중장비나 거창한 개발 독재의 횡포가 아니었다. 매년 반복되는 일상적인 ‘예초 작업’, 즉 웅웅거리는 예초기 날의 무심한 회전 몇 번에 이 귀한 서식지가 통째로 베여 나간 것이다.
이번 사건은 법 제도의 미비나 단순한 행정 착오를 넘어선다. 멸종위기종을 관리해야 할 국립공원도, 내저수지를 관리하는 농어촌공사도 모두 눈을 감았다. 오직 인간의 편의를 위해 저수지 둑에 하루빨리 매끄러운 데크길을 깔고 싶어 했던 조급함, 그리고 내 눈앞의 잡풀 뒤에 숨겨진 우주를 보지 못한 무감각이 결탁한 결과다. 정읍집강소는 이 비극을 통해 단순히 누군가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을 넘어, 다른 생명의 존재를 지워버린 우리 시대의 거시적 세계관을 깊이 성찰하고자 한다.
‘늘 하던 일’이라는 무감각, 일상이 저지른 생태계 학살
현장에서 예초기를 돌린 작업자에게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매년 봄·여름이면 찾아오는 늘 하던 일, ‘잡초 제거’라는 지시를 묵묵히 수행했을 뿐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이 가장 무섭고 슬픈 비극의 본질이다.
우리는 언제부터 자연을 ‘관리해야 할 대상’ 혹은 ‘제거해야 할 잡초’로만 바라하게 되었을까. 백양더부살이가 온 힘을 다해 밀어 올린 생명의 경이로움은, 인간의 시선에서는 그저 데크길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베어내야 할 풀때기’에 불과했다.
행정 기관들의 방조는 이 무감각의 깊이를 더해준다. 생태계의 최후 보루여야 할 국립공원조차 이 작은 식물의 터전을 놓쳤고, 저수지를 관리하는 한국농어촌공사 역시 일상적인 관리라는 명목 하에 시야를 닫아버렸다. 거창한 환경영향평가 서류 속 조항이 문제가 아니다. 현장을 직접 딛고 서 있는 기관들과 관리자들의 시선 속에 ‘인간 외의 생명’이 들어설 자리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저수지 둑의 데크길, 인간만의 유토피아를 향한 조급함
왜 이토록 서둘러 둑방의 풀들을 깎아내야 했을까. 그 기저에는 저수지 둑에 하루빨리 데크길을 깔아 인간들이 산책할 공간을 만들겠다는 조급함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두고 그 속에서 인간이 잠시 손님처럼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인간의 발걸음에 맞춰 완벽하게 박제하겠다는 오만함이다. 둑방길을 걷는 인간의 쾌적함을 위해, 그 둑방을 수백 년간 터전 삼아 살아온 진짜 주인들의 숨통을 끊어버린 셈이다. 지금도 물가에는 수달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이러한 조급함은 눈앞의 가시적 성과와 편리함만을 좇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이다. 멸종위기종의 터전을 깎아내고 세워진 화려한 데크길 위에서, 인간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동료 생명의 시체 위에 세워진 산책로는 인간에게 휴식이 아닌, 생태적 죄책감의 공간이 될 뿐이다.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 오랜 세월이 증명하는 공생의 서사
우리가 쉽게 지나치는 둑방의 거친 풀숲 사이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이 서로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이번 봄에도 나를 비롯한 이 땅의 수많은 이웃 생명들이, 오랜 겨울을 견뎌내고 다시금 수줍은 보랏빛 고개를 내밀 백양더부살이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흙 속의 미생물부터 날개 달린 작은 곤충들, 그리고 그 자연의 경이로움을 목격하며 삶의 위안을 얻던 인간에 이르기까지, 백양더부살이의 출현은 단순한 식물의 개화가 아닌 하나의 거대한 생태적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백양더부살이가 쑥의 뿌리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 기묘한 공생(共生) 역시, 인간의 얄팍한 효율성이나 손익계산으로는 결코 설명할 수 없는 대자연의 서사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지 못하는 약자가 일방적으로 강자에게 기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이 오랜 세월을 함께 진화하며 동행해 온 데에는 분명 우리가 아직 미처 깨닫지 못한 우주적 필요성이 존재할 것이다. 쑥은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어 줌으로써 둑방의 생태적 다양성을 풍성하게 만들고, 백양더부살이는 그 보답으로 쑥 군락의 과도한 독점을 견제하며 대지의 균형을 맞추어 왔을지 모른다. 정읍시민들에게 저수지 둑방이라는 인공의 공간에서 잠깐의 아름다움도 선사하고 말이다.
인간이 '잡초'라 명명한 그 연대의 현장은, 사실 수천 수만 년 동안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정교하게 짜 올린 생명의 그물망이었다. 인간의 무심한 예초기 날이 잘라내 버린 것은, 바로 이 오랜 세월이 증명해 온 공생의 신비와 그 안에서 피어나던 수많은 생명의 기다림 그 자체다.
백양더부살이의 생태적 가치
독보적인 희귀성: 전 세계에서 오직 한국에만 사는 고유종이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
특이한 기생 생태: 스스로 광합성을 못 하고 반드시 '쑥'의 뿌리에 기생해 자라므로, 인공 증식이 극도로 어려워 자생지 보전이 절대적으로 중요함.
환경 지표종: 하천 변이나 둑길 등 자연 상태의 토양과 식생 구조가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자연성의 증거
거시적 성찰: 인간만 살 수 있는 지구는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펠릭스 가타리는 "지구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 정신의 위기와 직결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번 백양더부살이 잔혹사는 단순히 식물 한 종이 잘려 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대 인류가 가진 세계관의 파산을 증명한다.
인간은 지구라는 거대한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겨우 한 가닥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쑥과의 필연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온 백양더부살이나, 그 속에서 생태적 틈새를 누리던 곤충들, 그리고 그 자연을 보며 숨을 쉬는 인간은 모두 하나로 연결된 유기체다.
인간만을 위한 독점적 공간을 넓혀갈수록, 지구의 생명력은 희박해진다. 주변의 다른 생명들을 모두 소거하고 오직 인간과 콘크리트, 그리고 정돈된 인공 잔디만 남은 지구에서 인간은 결코 홀로 생존할 수 없다. 다른 생명의 절멸은 결국 인간 자신의 종말로 이어지는 도미노의 첫 번째 조각이기 때문이다.
■ 한 시민의 눈: 예초기 날을 멈추고, 세계를 다시 바라볼 때 사건이 일어난 저수지 둑방은 이제 황량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누군가의 책임을 묻고 징계를 내리는 것은 오히려 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예초기 날에 잘려 나간 생태적 감수성까지 복원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문명 전체의 시선을 바꾸는 거시적 전환이다. 늘 해오던 효율 중심의 행정, 인간의 편리만을 절대 선으로 여기는 독점적 세계관을 멈춰 세워야 한다.
"이 풀을 베어내면 어떤 생명이 삶의 터전을 잃을까, 그리고 이 기다림의 고리가 끊어지면 우리는 무엇을 잃게 될까?"
예초기를 돌리기 전, 혹은 거대한 데크길을 구상하기 전 던졌어야 할 이 작은 질문이 곧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인간만 살 수 있는 지구는 없다. 백양더부살이가 사라진 텅 빈 둑방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무겁고도 엄중한 경고다.
<정읍집강소> 26.05.18